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르겐 힌츠페터 (문단 편집) == '광주비디오'가 되다 == 힌츠페터의 취재를 바탕으로 한 《기로에 선 한국(Südkorea am Scheideweg)》 다큐멘터리는 [[독일]]에서 유학 중이던 [[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]] 소속 [[한국인]] [[가톨릭]] [[신부(종교)|신부]]들이 녹화[* 독일의 송출 방식은 PAL이고 한국은 NTSC이지만 PAL 방식 VCR을 멀티 시스템 VCR에 연결하면 녹화가 가능하다. 한국은 1993년까지 개인의 멀티 시스템 수상기/VCR 소지를 제한했는데 이 일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.]한 뒤 번역해 귀국할 때 다른 신부들에게 몰래 전달하여 한국으로 들여왔다. 장용주 신부가 들여온 힌츠페터의 다큐를 보고 김성용 신부가 오디오를 제작하는 식이었다.[* 제목은 '오월 그날이 다시오면' 이며 위의 영상 51:17초 부분에 나온다.] 한편 다른 외국에서도 광주의 소식은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는데, 미국에 있었던 민주구락부 교민이 소식을 듣고 세계기독교연맹 목사와 자료를 수집한 끝에 일본에 한반도 상황을 알리려고 제작한 [[조총련]]의 16mm영상을 입수하는 식이었다.[* 조총련의 것이라 북한 영상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. 북한 소행설을 전혀 안 믿었기 때문.] 마침내 ABC 필름을 입수해 비디오를 편집 및 제작했고, 한국 성우 출신 교민을 기용해 내레이션을 만드는 식이었다.[* 이 초창기 '광주비디오'에서 남성 성우는 김응태, 여성 성우는 이유정이라고 알려져 있다.] 이후, 힌츠페터의 취재를 비롯한 '광주비디오'들은 언론 통제하의 [[대한민국 제5공화국]] 시절이었음에도 은밀하게 재야에 유입된다. 이는 성당과 대학가 등에서 상영되었고, 광주의 참상을 국내에 널리 알렸다. 예를 들어 82년 5월 워싱턴으로 이주한 교민 고재형은 1985년 마침내 비디오를 한국에 밀반입하는 데 성공했고, [[명동성당]] 청년회장이었던 기춘은 입수해서 돌린 뒤 명동성당 소성당에서 86년 5월 18~28일 동안 비밀 상영회를 열었다. 아날로그 시대인지라 비디오를 일일이 복사해야 했는데, 증폭기를 사용해 1개를 30개로 불어나게 만들면서 대략 2천 개 정도를 복제해내 전국으로 퍼지게 만들었다고.[* 출처: <광주비디오: 사리진 4시간>] 주로 외부 침입이 어려운 성당 지하나 구석진 곳에서 모든 조명을 소등하고 커텐까지 닫아서 상영했으며, 몇 명이 조를 짜서 침입에 대비하여 보초를 서기도 했다. 그러다가 걸려서 압수당한 적도 있지만, 어쨌든 이를 통해 전라도 지방에서는 80년 후반~81년 초부터 이 비디오를 몰래 보기 시작했으며, 그래서 특히 [[가톨릭]] 신자들의 상당수가 이 비디오를 많이 기억하고 있다. 이후 당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[[노무현]]과 [[문재인]]의 주도로 1987년 5월 [[부산]] [[가톨릭]]센터에서 최초로 정식 상영되었고, 이는 [[6월 항쟁]]에도 기폭제가 되었다.[* 그러나 대구에서는 부산과 달리 끝내 상영회가 무산되었다. 비디오 전달을 맡은 배급자 이도준이 검문받을 때 소지품 검사를 받으면 들킬까 봐 일부러 파출소에 길을 물어보는 척해서 에스코트를 받아 택시를 타서 검문을 피하는 등, 드라마틱한 일화까지 있는데도 말이다.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반발이 컸다고. 사진전은 가능했지만 상영회는 무리였다고 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